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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눈사람의 봄날 - 박서영 시인

눈사람의 봄날 - 박서영 시인 이사 다닌 집들이 눈사람처럼 녹아 사라져버렸다 환한 벚꽃이 깨진 창문을 잠시 엿보다 가버리고 이후의 긴 그늘에 대해선 모두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런 국도를 지나쳐, 지나쳐온 봄날이었다 길 고양이 한 마리처럼 도시 외곽에서 달을 분양 받았지만 나의 열망은 달과 태양을 제본하는 것 한겨울에 만든 눈사람을 한여름에도 들여다보는 것 태양의 밀짚모자를 쓴 채 달의 털모자를 쓴 채 태양과 달은 서로의 표정을 사각사각 베어 먹고 있다 그러나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는 뜨겁고 차가운 두 얼굴은 그냥 놔두시길, 괜한 관심으로 눈썹과 코와 입술을 그려 넣지 마시길, 지금은 눈사람처럼 녹아내리고 있는 집에 들어가 그 해의 환했던 벚꽃과 어느 여름밤의 뜨거운 포옹과 술렁이는 꽃그늘 따위를 모두 들고 ..

현대시/한국시 2022.12.07

(詩)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시인

링크: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1/18/2008011800034.html [애송시 100편-제14편] 한계령을 위한 연가 애송시 100편-제14편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 정 희 www.chosun.com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시인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현대시/한국시 2022.12.07

(詩) 11월의 나무 - 황지우 시인

11월의 나무 - 황지우 시인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 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측광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잇다 나는 등 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 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현대시/한국시 2022.12.07

(詩) 벽공무한 - 이성희 시인

벽공무한(碧空無限) - 이성희 시인 가을은 멀어지면 옵니다 멀어지는 것들의 등은 벌써 남빛으로 젖어 있네요 그대 멀어지면서 오세요 골목 어귀의 선술집에 등이 켜지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내부에 푸른 별이 켜집니다 저녁이면 우리는 모두 저마다 다른 별의 시간을 삽니다 낙엽의 거리에서 오랫동안 찾던 단어 하나를 놓아버린 사람은 별과 별 사이 아득한 허공을 헤매일 것입니다 남빛 시린 허공으로 그대 깊어져서 오세요 - 시집 (솔, 2013년)

현대시/한국시 2022.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