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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의 새 / 류시화 (1958-)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에서 히말라야 기슭 만년설이 바라보이는 해발 이천오백 미터 고지대의 한적한 마을에서 한낮의 햇살이 매서운 눈처럼 쏘아보는 곳에서 나는 보았다 늙은 붉은머리 독수리 한 마리 먹이를 찾아 천천히 공중을 선회하다가 까마귀 몇 마리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1941-) <대장간의 유혹>에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
시장에서 / 박원자 <하늘빛 너의 향기>에서 고추 장단지에 더덕이 안 보여 이른 아침 달려 간 시장 오늘 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인정 많은 아줌마되어 다 사주고 싶다 검버섯이 얼굴 가득한 저 할머니 풀이 죽어있는 저 아저시 까맣게 그을려 나이를 알 수 없는 키 작은 아줌마도 자기 것은 꼭 사줘..
열쇠 2 / 최규장 요즘은 숨겨야 할 것과 애써 지켜야 할 것이 왜 그리 많은가. 그리하여 몸에 지녀야 할 열쇠가 왜 그리 많은가. 숨겨야 할 것이 지켜야 할 것이 많을수록 나의 허리는 지닌 열쇠의 무게로 자꾸만 휘청거린다.
고마워, 내 사랑 / 원재훈 창문을 열자, 새소리가 들려온다 고마워, 내 사랑, 내 마음이 저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보이지 않는 것들을 들리게 해 주는 것은 오로지 너의 사랑뿐 소나무 가지 사이에 새 한 마리 휙 날아간다 고마워, 내 사랑, 저 날아가는 새들을 보여 주다니 들리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만물은 흔들리면서 오규원 만물은 흔들리면서 흔들리는 만큼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 있는 잎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만의 잎은 제각기 잎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들판의 고독 들판의 고통 그리고 들판의 말똥도 다른 곳에서 각각 자기와 만나고 ..
사랑으로 머물러 주었으면 글 / 도현금 사모하는 애절함이 물망초 같은 그리운 마음으로 초롱초롱 맺혀 방울방울 구르더니 가슴팍을 타고 내린다. 그리움이 모락모락 꽃향기 속에 피어나 가슴 여민 곳 깊은 마음샘 골짜기에 차곡차곡 가득 차오른다. 그대 내 마음에 사랑의 둥지 틀고 내 영혼을 쓸어 ..
종소리 / 정호승 (1950-)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중에서 사람은 죽을 때에 한번은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고 죽는다는데 새들도 하늘을 향해 푸른 하늘을 향해 한번은 맑고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고 죽는다는데 나 죽을 때에 한번도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지 못하고 눈길에 핏방울만 남기게 될까봐 두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