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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窓) 글 / 노을 창을 닫지 말아요 아름다운 색을 지우는 까만 밤과 같이 생동감을 억누르고 혼자만 독식하는 어둠을 안고 있지 말아요 창을 열어 두어요 햇살을 뿌려 놓은 하늘 빛이 당신의 가슴에 뿌려 지도록 마음에 빛을 담아요 두려움은 절대로 창을 두드리지 않으며 당신의 마음에서 싹터 오는 ..
여행자를 위한 서시 / 류시화 (1958-)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에서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을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가리라 한때는 불꽃 같은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불우한 악기 허수경 불광동 시외버스터미널 초라한 남녀는 술 취해 비 맞고 섰구나 여자가 남자 팔에 기대 노래하는데 비에 젖은 세간의 노래여 모든 악기는 자신의 불우를 다해 노래하는 것 이곳에서 차를 타면 일금 이천 원으로 당도할 수 있는 왕릉은 있다네 왕릉 어느 한 켠에 그래, 저 초라를 벗..
詩의 명상 산에서 배우노라 率巨 崔明雲 산은 수양을 닦는 무언 거사라 도가 깊어 말이 없고 수양이 넓어 참을 줄 알고 권세가 없어 그 어느 삶도 다스리지 않는다 예리한 눈비 태풍에도 끈질기게 인내하니 산은 도를 깨달은 성인이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운무를 안았어도 무겁다 답답하다 아니하..
대패질 반쯤 걸터앉아 목하 고심 중, 갈 길 잃은 빛 몸살에 부르르 각이 떤다. 구석 훑는 익숙한 눈살에 쌍심지 세운 등골 핏대가 핼쓱하다. 욕망이여, 욕되어 보이는가. 분노여, 부끄러워 보이는가. 모질게 돋친 가시 모난 데 찾아 둥글 둥글게 턱을 간다. 밀리는 때처럼 자만이 밀리고 원망이 밀리고 ..
조문 후 단상(망각) 바우 이훈식 어젯밤 선명하게 꾸었던 꿈도 다 기억 못 하듯이 가슴 썰어대던 아픔이 있어도 그냥 가슴에 묻어 두세요. 산천이 얼어붙은 뼈 시린 겨울 애절함으로 깊이 묻어 둔 그리움 하나가 핏빛 상사화를 피워 낸답니다. 누구나 낮 뜨거운 죄 울음처럼 가지고 사는 게 우리들의 세..
너희는 시발을 아느냐 / 신현림 (1961-) <세기말 블루스> (창비 1996) 중에서 아, 시바알 샐러리맨만 쉬고 싶은 게 아니라구 내 고통의 무쏘도 쉬어야겠다구 여자로서 당당히 홀로 서기엔 참 더러운 땅이라구 이혼녀와 노처녀는 더 스트레스 받는 땅 직장 승진도 대우도 버거운 땅 어떻게 연애나 하려..
창 / 신현림 (1961-) <세기말 블루스> (창비 1996) 중에서 마음이 다 드러나는 옷을 입고 걷는다 숨어 있던 오래된 허물이 벗겨진다 내 허물은 얼마나 돼지처럼 뚱뚱했던가 난 그걸 인정한다 내 청춘 꿈과 죄밖에 걸칠 게 없었음을 어리석음과 성급함의 격정과 내 생애를 낡은 구두처럼 까맣게 마르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