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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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노을 - 기형도 시인현대시/한국시 2022. 6. 6. 19:52
노을 – 기형도 시인 하루 종일 지친 몸으로만 떠돌다가 땅에 떨어져 죽지 못한 햇빛들은 줄지어 어디로 가는 걸까 웅성웅성 가장 근심스런 색깔로 서행하며 이미 어둠이 깔리는 소각장으로 몰려들어 몇 점 폐휴지로 타들어가는 오후 6시의 참혹한 형량 단 한 번 후회도 용서하지 않는 무서운 시간 바람은 긴 채찍을 휘둘러 살아서 빛나는 온갖 상징들을 몰아내고 있다. 도시는 곧 활자들이 일제히 빠져 달아나 속도 없이 페이지를 펄럭이는 텅 빈 한 권 책이 되리라. 승부를 알 수 없는 하루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패배했을까, 오늘도 물어보는 사소한 물음은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텅텅 흔드는 것. 오후 6시의 소각장 위로 말없이 검은 연기가 우산처럼 펼쳐지고 이젠 우리들의 차례였다. 두렵지 않은가. 밤이면 그림자를 빼앗겨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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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오래된 기도 - 이문재 시인현대시/한국시 2022. 6. 6. 19:48
오래된 기도 – 이문재 시인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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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어머니의 오월 - 김근이 시인현대시/한국시 2022. 5. 28. 10:10
어머니의 오월 - 김근이 시인 오월이 꽃들을 거느리고 사월이 깔아놓은 초록 숲에 내려앉았다 화려한 귀환이다 제법 따가워진 햇볕아래 밀짚모자 눌러 쓰고 밭고랑을 누비시던 어머니의 오월 그 세월만큼이나 서러워지는 오월에 기대여 바라보면 그때 세월이 슬프게 안겨온다 아카시아 꽃이 만발한 언덕 오월이 꽂아놓은 깃발이 가슴을 펄럭이게 하는 세월 난간에 선 어머니 돌아보면 화살같이 스쳐간 어머니의 세월 그 세월 속에 심어두고 온 눈물 꽃 피우지 못해 죄인으로 돌아간 인생 아쉬워 이 오월을 기다렸을까 그 혹독한 보릿고개를 숨차게 오르시는 어머니의 잦은 발걸음에 채이든 오월이 그 세월을 벗어던지고 지금은 왕관을 쓰고 화려하게 돌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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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스승의 기도 - 도종환 시인현대시/한국시 2022. 5. 16. 15:01
스승의 기도 – 도종환 시인 날려 보내기 위해 새들을 키웁니다 아이들이 저희를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당신께서 저희를 사랑하듯 저희가 아이들을 사랑하듯 아이들이 저희를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저희가 당신께 그러하듯 아이들이 저희를 뜨거운 가슴으로 믿고 따르며 당신께서 저희에게 그러하듯 아이들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며 거짓없이 가르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아이들이 있음으로 해서 저희가 있을 수 있듯 저희가 있음으로 해서 아이들이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게 해 주십시오 힘차게 나는 날개 짓을 가르치고 세상을 올곧게 보는 눈을 갖게 하고 이윽고 그들이 하늘 너머 날아가고 난 뒤 오래도록 비어 있는 풍경을 바라보다 그 풍경을 지우고 다시 채우는 일로 평생을 살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