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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은행나무 – 박형권 시인

은행나무 – 박형권 시인 사람 안 들기 시작한 방에 낙엽이 수북하다 나는 밥할 줄 모르고, 낙엽 한 줌 쥐어주면 햄버그 한 개 주는 세상은 왜 오지 않나 낙엽 한 닢 잘 말려서 그녀에게 보내면 없는 나에게 시집도 온다는데 낙엽 주고 밥 달라고 하면 왜 뺨맞나 낙엽 쓸어 담아 은행 가서 낙엽통장 만들어 달라 해야겠다 내년에는 이자가 붙어 눈도 펑 펑 내리겠지 그러니까 젠장 이 깔깔한 돈 세상에는 처음부터 기웃거리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낙엽 주워 핸드백에 넣는 네 손 참 곱다 밥 사먹어라

현대시/한국시 2022.10.30

(詩) 밥 생각 – 김기택 시인

밥 생각 – 김기택 시인 차가운 바람 퇴근길 더디 오는 버스 어둡고 긴 거리 희고 둥근 한 그릇 밥을 생각한다 텅 비어 쭈글쭈글해진 위장을 탱탱하게 펴줄 밥 꾸룩꾸룩 소리나는 배를 부드럽게 만져줄 밥 춥고 음침한 뱃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밥 잡생각들을 말끔하게 치워버려주고 깨끗해진 머릿속에 단정하게 들어오는 하얀 사기 그릇 하얀 김 하얀 밥 머리 가득 밥 생각 마음 가득 밥 생각 밥 생각으로 점점 배불러지는 밥 생각 한 그릇 밥처럼 환해지고 동그래지는 얼굴 그러나 밥을 먹고 나면 배가 든든해지면 다시 난폭하게 밀려들어올 오만가지 잡생각 머릿속이 뚱뚱해지고 지저분해지면 멀리 아주 멀리 사라져버릴 밥 생각

현대시/한국시 2022.10.30

(詩) 전봇대는 혼자다 – 장철문 시인

전봇대는 혼자다 – 장철문 시인 말라깽이 전봇대는 꼿꼿이 서서 혼자다 골목 귀퉁이에 서서 혼자다 혼자라서 팔을 길게 늘여 다른 전봇대와 손을 잡았다 팔을 너무 늘여서 줄넘기 줄처럼 가늘어졌다 밤에는 보이지 않아서 서로 여기라고 불을 켠다 서로 맞잡은 손과 손으로 기운이 번져서 사람의 집에도 불이 켜진다

현대시/한국시 2022.10.30

(詩) 푸른 밤 - 나희덕 시인

푸른 밤 - 나희덕 시인 너에게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떠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현대시/한국시 2022.10.30